-
take half, leave the other half(8/30)카테고리 없음 2019. 9. 2. 03:15
오늘은 꿀 빠는 아니 꿀 따는 날이다. 올 봄에 키우기 시작한 벌이 만든 꿀이다. 팜스쿨 양봉 선생님인 앤이 딸기 밭에 두었던 3층 짜리 벌통을 가져왔다. 한 층 마다 10개의 프레임이 있는데 그걸 하나씩 꺼내서 거기에 모인 꿀을 추출하는 것이다. 꿀은 당연히 육각형으로 되어 있는 벌집(honeycomb)에 들어 있는데 육각형의 방 마다 얇은 왁스로 된 뚜껑이 있다. 벌이 꽃에서 꿀물(nectar)를 먹은 후 벌집으로 와서 다시 뱉어 놓으면 일벌이 그 꿀물을 방에 저장해 놓는데 처음부터 뚜껑을 닫는 것은 아니다. 꿀물이 꿀이 되려면 벌이 먹고 다시 뱉어 놓을 때 벌 내장에 있는 엔자임이라는 것과 섞여야 하지만 꿀물에 있는 수분이 어느 정도 날라가야 한다. 꿀물에서 물을 증발시키는 일을 일벌은 수 없는 날개 짓으로 해낸다. 그런 다음 방의 뚜껑을 자기의 몸에서 나온 왁스로 막는다. 그래야 꿀이 새지 않는다. 그래서 꿀을 따는 것을 uncapping 뚜껑을 연다고 부르는 거 같다.
질 좋은 꿀이 되기 위해서는 수분이 20%를 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uncapping을 하기 전에 꿀 수분 측정기(moisture spectrometer)라는 것을 사용해서 꿀의 수분 함량을 잰다. 그 측정기로 꿀의 수분 함량을 재보니 17.5% 정도 된다. 적정한 수분 함량이다.
먼저 벌통에서 프레임 하나를 꺼내서 uncapping용 칼과 포크(uncapping knife/folk)로 honeycomb을 긁어내서 통에 담는다. 통의 가운데에는 필터가 있어서 꿀만 아래로 떨어지고 왁스는 위에 남는다. 이렇게 칼과 포크로 벌집(honeycomb)을 긁어 낼 때 프레임에 붙어 있는 파운데이션(벌통을 만들 때 벌이 육각형의 방을 만들기 쉬우라고 플라스틱 등으로 이미 육각형 본을 떠놓아 만든 벌집)과 벌이 만든 벌집(honeycomb)자체가 완전히 파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파운데이션은 (병충해를 막기 위해 6년에 한번 씩은 완전히 교체해 주어야 하지만) 내년에 다시 써야 하고 벌집 안에 있는 꿀은 어느 정도 추출한 후에 다시 벌에게 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칼과 포크로 어느 정도 꿀을 uncapping한 뒤에는 프레임을 추출기에 집어 넣고 돌린다. 앤이 가져온 것은 수동 스테인레스 추출기인데 4개의 프레임을 넣고 손으로 틀을 회전시켜 프레임에 붙어 있는 벌집 안에 남은 꿀을 추출하는 것이다. 이 때에도 벌집 자체가 부서지거나 꿀을 너무 많이 추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벌집에 있는 꿀 중에 반 정도는 다시 벌에게 가져다 줘야 하기 때문이다. 벌이 만든 꿀을 다 추출하고 벌에게는 시럽을 주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앤은 벌에게 자기가 만든 꿀을 돌려주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이렇게 꿀을 따는 동안에 우리는 손 가락으로 떨어지는 꿀을 찍어 먹는다. 가끔을 벌집 조각을 통째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꿀은 빨아먹고 왁스는 다시 뱉는다. 학생 농부들은 물을 끓여 자기가 좋아하는 차를 만든 다음 거기에 바로 꿀을 넣어서 마신다. 벌이 어느 식물의 꽃을 먹고 꿀을 만들었는지에 따라 꿀의 색깔도 다르고 맛도 다른데 모두들 벌이 딸기 꽃을 먹고 만든 이 꿀이 먹어본 꿀 중에 최고로 맛있다고 한다. 이렇게 오늘 딴 꿀을 학생농부들은 조금씩 병에 담아 나누어 가졌다.
"반만 가져가고 반은 남기세요" 앤이 꿀을 따면서 너무 많이 추출하지 않고 반은 꿀에게 가져가야 한다고 말 할 때 얼마전 에머스트 시네마에서 본 다큐멘터리 영화 Honeyland의 대사가 생각났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 Hatidze가 이웃집 남자에게 양봉을 가르쳐주면서 계속 이르는 말이다. 양봉은 Hatidze가 척박한 땅에서 홀로 병든 노모를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생계수단이지만, Hatidze는 이웃 남자의 부탁에 기꺼이 벌 치는 법을 가르쳐준다. 자기 집 옆에서 벌을 쳐도 좋지만 꿀은 반만 수확하고 나머지 반은 벌을 위해 남겨두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배고픈 벌이 자기의 벌통을 공격할 거라고.
하지만 이미 수십 마리의 소를 치고 있으면서도 그 남자는 큰 돈을 준다는 도매상의 회유와 딸린 자식들을 돌봐야 한다는 핑게로 Hatidze와의 약속을 어기도 자기 벌통의 꿀을 모조리 수확해버린다. 그러자 배가 고파진 벌들은 죽거나 Hatidze의 벌통까지 공격해 그의 벌까지 다 죽게 만든다.
감독이 북마케도니아 어느 마을에서 오래 살면서 찍었다는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내가 안식년 기간 동안 본 영화 중에 최고이지 않나 싶다. 영화는 한 마을에서 어느 여성과 그 이웃에게 일어난 일을 담고 있지만 사실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이웃집 남자가 Hatidze와 약속을 어겨서 벌어지는 비극에 한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산업화된 사회에 살고 있는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가 누리는 부는 다름 아닌 (그것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든, 자연이든, 미래의 세대든지 간에) 다른 존재에 대한 착취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착취는 다시 영화가 보여주듯이 착취를 당하는 사람 뿐 아니라 언젠가는 착취 하는 사람도 망하게 만든다. 기후 변화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니 한숨은 영화 속 Hatidze의 이웃 남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걸 보는 우리에 대한 것되었어야 한다. (8/30 쇠날).
*honeyland 예고편 https://www.youtube.com/watch?v=B27ORUHlp6E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