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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 (4/20)카테고리 없음 2019. 4. 21. 06:04
보스톤 Tatte라는 베이커리에서 찍은 계단 얼마 전까지는 "벌써 반이나 지났네!"였다. 그런데 3/22일 이후부터 "5, 6, 7, 8, 9월......아직도 다섯 달이나 남았네"가 되었다. 그 전까지는 팜스쿨은 나에게 안식년을 보내는 가장 이상적인 장소로 였다. 그런데 요즘은 거의 매일 팜스쿨을 떠날까 말까 고민 한다. 3/22 생긴 한 사건 이후 부터 이렇게 되었다.
안식년을 떠나기 전에 사람들에게 한 말이 있다. "미국에서 이주민으로 지내면서 이주민의 어려움도 경험하고 오겠습니다." 언젠가 포스팅 했듯이 이주자로서의 나의 어려움은 아이러니하게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친절함 때문에 도드라졌었다. 친절을 경험하면서도 "늘 나의 안전은 주변 사람들의 자발적인 친절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상대방의 친절을 이끌어 내기 위해 나는 평소보다 더 친철한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쓴거 같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건 배부른 소리였다. 당시 나의 취약성은 잠재태였고 추상적인 거였다. 그런데 3/22 이후에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나의 취약성은 이제 현실태가 되었고 아주 구체적인 것이 되었다. 이주자로서의 어려움을 제대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3/22은 팜스쿨 내의 인종적인 갈등/분쟁을 해결할 프로세스를 만들기 위한 워킹그룹 첫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참석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 같아서 참석하기로 했다. 요즘도 그 때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본다.
그 날 회의에서 나중에 나와 분쟁을 하게 된 학생농부 A가 회복적 정의에 대해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나는 좀 짜증이 났다. 그 친구가 회복적 정의에 관해서 일주일 내내 강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수개월 동안 다른 사람과 의 분쟁 당사자로서 A는 회복적 정의의 관점에서 거의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다. 게다가 스탭들이 다 백인인 상황에서 인종적인 문제를 회복적 정의에 맡기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인종적인 이슈에서 학생들은 물론이고 스탭들까지 제3자는 아무도 없었고 모두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팜스쿨에서 매일 농사만 배우다가 오랜 만에 회의 모드로 들어가서 그런지 그 회의에서 나는 너무 진지했다. A에 따르면 내가 자신이 말하는 동안 계속 한 숨을 쉬었다고 한다. 그 회의가 끝나고 A의 태도가 돌변했다. A는 한마디로 나를 존재하지 않는 사람 취급을 했다. 말을 걸거나 인사를 해도 받지 않았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워킹그룹 멤버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내가 가부장적이고, 반흑인적이고, 백인우월주의를 옹호한다고 비난을 했다.
이러한 비난과 거절의 경험이 내가 그 사회의 주류의 일원이었다면 별거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주민으로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되니 겁이 났고 여기가 안전한 곳이 아니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언어적 유창함이 없고 인종적/민족적 동질 그룹이 없는 사람으로서 (상대방이 말을 할 때 한숨을 내 쉰) 불친절의 댓가를 혹독하게 치루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틀을 지낸 뒤 나는 용기를 내서 용서를 빌기로 했다. 토요일 오후였는데 나는 밖에 나가서 A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A가 왔을 때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A는 내가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보고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그러자고 했다. 나는 A에게 상처를 줘서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사과를 했다. 그리고 내가 왜 그 때 그런 식으로 한숨을 쉬었는지 해명을 했다.
A는 내 사과를 받아드렸고 서로 허그를 하면서 화해를 했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한 참을 더 이야기 했고 이전 보다 저 가깝게 지내자고 다짐도 했다. 그 날은 괜찮았다. 나는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일어났다고 믿었다. A와 관계가 회복되었다는기쁨도 있었고 용기를 내서 사과 한 내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괜찮은 상태가 오래 가지는 못했다. 다시 A는 차가워 졌고 나는 다시 겁이 났다. 만나면 먼저 인사를 하고 말은 건네는 것은 항상 나였고 A는 마지 못해 대꾸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A를 대하는 것 자체에 엄청난 에너지가 들었다.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내 생각은 시계추처럼 양 극단을 왔다갔다 했다. "호기롭게 안식년을 떠나기 전 이주민의 어려움에 대해서 경험을 해보겠다고 했는데 이게 바로 그것을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과 "내가 쉬고 재충전하기 위해 안식년을 왔는데 여기서 지치고 소진되어서 가는 것이 맞는가?"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교차했다.
지금까지는 A의 이러한 행동을 A의 입장에서 이해를 해보려고 애를 썼다.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서 개인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겪은 인종차별의 트라우마 때문에 나의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차별적 행동(다른 사람들이 말할 때 한번도 한숨을 쉬면서 무례하게 한 적이 없는데 A가 말할 때 한 숨을 쉰 것)을 인종차별적인 큰 상처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그런데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것과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아니 그런 식으로 A를 이해 하려고 하니까 더 두렵고 더 힘든 것일 수도 있었다.
조금 전에도 부엌에서 마주친 A에게 "하이 A"라고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간단한 인사를 하는 것 만으로도 거절의 두려움 없이 할 수 없기 때문에 지치는 일이다. A는 역시 이번에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헤이"하고 만다.
나는 아마도 팜스쿨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팜스쿨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앞으로 A에게 먼저 인사를 건내는 것을 그만 두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인종주의의 피해자로서 A를 이해하는 것도 그만 두고 A는 그냥 나쁜 사람asshole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내일이 부활절이다. 그리고 부활절을 이런 마음으로 맞는 것이 참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 (4/20 흙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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