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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리나 리퍼와 food memory (10/6)카테고리 없음 2018. 10. 29. 10:33부엌 테이블에 아무렇지 않게 담겨진 고추들이 있었다. 나는 왜 이것을 먹어보려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제 오리엔테이션 첫날 밭에 가서 고추를 따서 옷에 스윽 닦아서 먹는 사람들이 기억이 나서 파프리카 처럼 이것들도 그냥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까. 먼저 파란 고추를 먹었다. 파프리카 보다 살짝 매웠으나 그냥 먹을만 했다. 한국 사람이 누군가 청양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 다음 오렌지색 고추를 먹어봤다. 파란 것보다는 더 매웠지만 청양고추 보다는 맵기가 훨씬 덜해 호기롭게 다 먹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고 둥굴게 생긴 녀석을 한 입 물었다. 그리고 나서 진짜 리터럴리 죽었다가 살아났다. 물을 2리터는 더 마신거 같았다. 그래도 입속에 맵기가 가라않지 않았다. 빵이나 설탕을 먹으면 괜찮다는 말이 생각나서 빵을 한조각 물었으나 마찮가지였다. 눈물도 났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은 체 하려고 했으나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본 학생들은 우유를 먹어보라고 했다. 우유를 한 모금 마신 후 토를 하기 위해 화장실에 가려고 했으나 두개의 화장실 모두 닫혀있어서 방으로 가서 비닐 봉지를 찾아 모두 게워냈다. 입 속의 매운 맛은 가셨지만 위 속에 들아갔던 고추의 매운 기운은 여전했다. 그리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배가 아파 앉자 있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배를 움켜진 채 바닥에 엎드려 한 20분은 있었던거 같다. 나중에 괜찮아 진 후 인터넷을 찾아보니 내가 마지막에 먹었던 고추의 이름이 카롤리나 리퍼(carlonia reaper)라는 건데......OMG! 청양고추 맵기의 250배라고 한다.내가 1년 동안 배울게 될 메사추세츠에 있는 팜스쿨 프로그램의 이름은 Learn to Farm(LTF)이다. LTF에 지원할 때 가장 매력적으로 느꼈던 것은 학생들이 자신이 키운 것을 가지고 서로를 위해 요리를 한다는 것이다. 먹은 것이 퇴비가 되고 퇴비가 작물을 키우고 그 작물로 요리를 한다니 그야말로 holistic하지 않은가. 그러니 LTF에서 농사 말고도 요리가 중요한 부분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입학한 둘째날 오리엔테이션은 부엌에서 요리를 주제로 열렸다.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하기 전에 서로 돌아가며 가장 인상적인 food memory를 이야기 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엌에서 수다를 떨면서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던 기억이 많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겠다 싶었다. 그 날 아침에 일어났던 일이 없었다면 나는 그 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조금은 난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제 food memory은 아주 최근에 있어난 것인데요"라고 하면서 그날 아침 카롤리나 리퍼를 먹고 벌어진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모든 학생들이 크게 웃었다. 그리고 나중까지 가장 재미있었던 food memory로 회자가 되었다. 고추를 먹고 아파서 바닥을 뒹굴 때에는 "농사학교에 들어와서 LTF의 오리엔테이션도 다 끝내지 못하고 죽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괜찮은 시작이었다. (10/6 흙날)